Der Original-Text der Biographie der Chung-Noh Gross,
mit Anmerkungen über den historischen und kulturellen Kontext, zum Verstehen des Textes, von Yunsoo Cho
한정로 생애글 2025년 5월 6일
8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1966년 가을, 22살 한국 간호사가 겁도 없이 [한국] 해외 개발 공사에서 독일에 간호사가 부족해 한국 간호사들도 찾는다는 소식을 알자, 당시 가난했던 우리 집안도 도울 겸 아버님 어머님의 걱정을 물리치고 독일에 가기로 했다. 원칙은 부자였었다. 아버님이 일본 전문 대학 공대를 나오시고 만주에서 기술자로 이후 한국에서 전매청에 다니실 때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살고 나간 큰 대궐 같은 집을 사시고, 부엌이 둘이고 화장실이 두 개, 건물 집 안에 우물이 있는 대궐집이었다. 당시 언니는 학비를 내는 사립 부속 국민학교에 다니다가 이후 갑자기 아버님이 퇴직을 당하자 살 길을 찾기 위해서 쌀장사 개업을 했었다.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셨다. 이로 부모님이 서로 다툼이 자주 오가고 가난해지면서 결국 이사를 가면서 작은 집을 구입해서 생계를 유지해왔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시작하고, 똑똑해서 재일 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재일 여자중학교는 공부를 잘해야 들어가는 학교다. 오빠는 천재라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집안은 더 가난해지기 시작하여, 겨우 고등학교를 끝냈다. 오빠는 대학을 나와 약사가 되었고 약국까지 운영하게 되었다. 나는 독일에 간호사로 와서 독일인과 결혼하였다. 아이 둘을 데리고 독일 국가고시를 합격했다. 그 후 아이들을 둘 데리고 베를린 자유대학 의대를 다녔으나 너무 어려워서 중퇴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었을 때에는 학부형 장까지 담당했다. 일도 많은 가정주부로서 아이들 교육, 집안일 등, 나이가 들어가니 고향 언덕의 무지개를 생각해 본다.
태어난 모국에서의 삶보다는 베를린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온 세월이 더 오래된 한국인으로서, 독일인으로의 삶이 근 50년이 되어도, 나는 한국인이다. 서류상으로의 국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 마음의 고향, 내 정서의 고향이 항상 앞선다. 나는 독일인이면서도 오랫동안 이주민, 고향 잃은 나그네라는 느낌을 받는다. 80세가 되는 지금은 이 마음이 사라졌다. 죽을 날이 돌아와서 (가까워져서)인지?
간호사로, 독일 남자의 아내로, 의대를 다니는 학생으로, 두 아이의 엄마로, 한국 여성 단체들의 일원으로, 인권 운동… 일본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 회복 – 한국 단체들, 재독 일본 여성들, 독일의 인권 운동가들과 성 노예 피해자(일본군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사회운동 -,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운동을 통해 바쁜 삶을 살면서, 국적이든 무엇이든 상관 하지 않는 지구인이 된 듯하다.
그래서 그럴까? 환갑이 넘고부터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이 자주 입가에 맴돈다.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본향은 역시 하늘이기에 그럴까? 꽃다운 젊은 처녀로서 1966년 가을, 3년 계약을 한 간호사로서.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취업하여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나는 외국 땅에 정착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독일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점점 독일에 이주한 한국 여성이 되어갔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서 되돌아보면 지나온 내 삶이 과연 온전히 나의 것이었는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독일 땅을 고향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베를린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베를린은 젊은이는 없고 장벽에 갇혀 어쩔 수 없는 늙은이들만 살고 있는 갇힌 도시였다.
Havelhöhe Lungen Krankenhaus.
결핵 병원이었다. 모두 비슷비슷한 얼굴들이어서 독일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비롯하여 가지가지 힘든 일을 겪었으나, 환자들에게 친절하여 칭찬을 받았고, 독일 간호사들, 그리고 의사들과 서로 잘 이해했다. 한국 간호사들은 기술적으로 아는 것이 많아서 수월했다. 한국 간호사들은 정맥 주사 등 주사를 아프지 않게 잘 놨다. 독일이 간호 기술면으로는 한국보다 낮기에, 한국 간호사로서 자진해서 독일 보조 간호사들을 항상 주의시켰다. 간호사로서의 전문적인 교육은 따로 없었다. 내가 베를린 자유대학교 이비과로 병원을 옮겼을 때, 전문성이 한국과 비슷하여 내가 노력을 했어야 했다. 어려운 라틴어로 된 약품, 주사 등을 구별하여 투여할 때 실수가 없어야 했다! 한국 간호사로 대우를 받고 내 위치를 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 환자의 혈관에서 주사로 피를 뽑는 일은 전문성이 있어야 했다. 나 자신이 더 전문성 있게 노력했어야 했다.
마흔 해를 함께 살다 보니 독일 사람인 내 남편이 – 단 한 번도 – 나 하고는 다른, 외국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남편이 한국화되었는지, 내가 독일화되었는지 따져볼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린 모두 독일 사람인 동시에 한국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면서도 가끔씩은 마음 아픈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진 직후의 동독 사람들은 서독의 부를 외국인들이 누리는 데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자기네들이 누려야 할 부를 외국인들이 누리고 있다는 시기와 질투, 상대적 박탈감이었으리라고 짐작됐다. 그러나 그들의 적대적 눈길에 속수무책으로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는 나를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자전거를 발로 차려고 하는 등의 적대행위는 정말 차갑고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여유로움으로 바뀌었다. 언젠가 베를린 시가지를 관광하는 한 무리의 동독 젊은이들과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젊은이가 나를 향하여 “여기는 내 나라인데, 너는 외국 사람이 왜 여기에서 사느냐?”라며 큰소리쳤다! 전 같으면 겁을 먹었겠지만 여유를 찾은 나는 그들을 향하여 “나는 베를린에 와서 너희 나라의 노인네들이 수두룩한 이 나라에 생명을 구하는 간호사 일을 해왔다. 내가 그들을 돕고 있었을 때, 너희들은 아직 생명체로서 태동하지도 않았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발악하던 그들의 얼굴이 하얘지더니 사라졌다. 그 후로부터 나는 더욱 자신감이 생겨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당당해질 수 있었다. 요즘은 통일 직후의 그 험악한 외국인 혐오 현상은 많이 누그러져서 두려움 없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꿈을 꾸어도 한국말이 아닌 독일어로 꿍을 꾸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나도 모르게 내 정체성이 독일화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나는 오랫동안 양로원 자원봉사를 하면서, 치매증이 진행된 노인들은 어린 시절 무의식 가운데 배운 모국어와 어린 시절의 본능적인 일들만 기억할 뿐 교육을 통해 후천적으로 배운 외국어나 인간관계들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과연 내가 나이가 더 들어 치매에 걸린다면 어찌 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가끔씩 나를 엄습하기도 한다. 여기 베를린에는 이미 많은 한국 간호사들이 나이가 들어 연금으로 살아가고 있고 이런 정년퇴직자들은 늘어가고 있는데 그 가운데 누군가가, 아니 내가 치매 노인이 된다면 어찌해야 하나? 반세기 가깝게 배우고 생활해 온 독일어는 다 잊어버리고 깊숙한 본능의 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한국어만 기억하게 된다면, 그 한국어를 익힐 때인 어린 시절만 몸짓으로 표현하게 된다면 과연 독일 간호사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반세기 전 서독에 온 우리 한국 간호사들처럼 이들 독일 간호사들도 성심을 다해 돌보아줄까? 아니, 그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도 말이 통하지 않고 바탕에 깔려있는 문화도 다르니, 정말 힘들어서, 돌봄과 시중을 포기할 것 같은 두렵고 끔찍한 생각이 든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이주 한국인들의 수도 많고 경제력도 있어서 한국 실버타운이나 한국인 전용 양로원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은 이런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독일의 사정은 그러하지 못하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독일에는 노인 치매 환자들을 위한 복지시설이 한국보다 월등하게 잘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평생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아이들도 알아보지 못하며, 말이 안 통하고, 본능에 가까운 문화 의식이 다른 독일 간호사들의 이해 없는 보살핌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참으로 그런 상황이 싫다. 그래서 만약 내가 치매 증상 진단을 받게 된다면, – 나는 의미 없는 치매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려는 준비로서 – 미리 유서를 써 놓겠다고 남편에게 말해두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양로원 봉사활동을 통해 수없이 목격해온 치매 노인들이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여러 가지 다른 모습에서 깨달은 지혜라고 말하고 싶다.
Die historische und kulturelle Kontexte zum Verstehen des Textes: : Für LeserInnen, die den Inhalt des koreanischen Geschichte mehr wissen möchten.
- 한국 해외 개발 공사: KODCO, Korea Overseas Development Corporation ist staatlich finanzierte Organisationen, die die Entwicklung der Koreaner im Ausland unterstützen, einschließlich Einwanderung und Beschäftigung im Ausland. Ab 1966 begann unter der Leitung von Dr. Lee Su-gil, einem Arzt an der Universität Mainz, die Entsendung von Krankenschwestern in großem Umfang. Von diesem Zeitpunkt an übernahm die KODCO die Anwerbung und Entsendung von Krankenschwestern. Von 1966 bis 1976 entsandte die koreanische Regierung im Rahmen des Programms zur Ausfuhr von Arbeitskräften rund 10.226 Krankenschwestern nach Deutschland (Westdeutschland), um die Arbeitslosigkeit zu bekämpfen und Devisen zu verdienen.[1]
- 전매청(專賣廳)[Jeon-mae-cheong]: Eine externe Agentur des Finanzministeriums, die das Monopol auf Tabak, roten Ginseng und Produkte aus rotem Ginseng sowie die Ginsengverwaltung überwachte.[2]
- 위안부: “Trostfrauen” ist ein euphemistischer Begriff für Mädchen und Frauen, die für die japanischen Kriegsbordelle des Zweiten Weltkriegs zwangsprostituiert wurden. Die meisten Opfer – etwa 40 % der Trostfrauen – stammten aus Japan, ferner aus Korea und Taiwan sowie den besetzten Gebieten wie Indonesien, Malaysia, Philippinen und China.[3] Öffentliche Debatte nach dem Krieg bis heute sind immer noch offen. Eine Friedensstatue für die “Trostfrauen” befindet sich seit 2020 auf dem Unionplatz im Ortsteil Moabit des Bezirks Mitte von Berlin, die durch die Aktionsgruppe Trostfrauen des Korea-Verbands initiiert wurde.
- 귀천 [Gwi-cheon]: Das Gedicht “귀천 (Back to Heaven)”wurde vom Dichter Cheon Sang-byung geschrieben, nachdem er 1967 fälschlicherweise des East Berlin Affair[4] (동백림 사건 [Dongbaekrim-Vorfall]) beschuldigt und gefoltert worden war. Der Titel des Gedichts bedeutet „in den Himmel zurückkehren“, die Welt wie das Picknick verlassen und in den Himmel zurückkehren.
- 천상병: Cheon Sang-byeong (* 29. Januar 1930 in Japan; † 28. April 1993) war ein südkoreanischer Lyriker.
Original Text translated in english by Brother Anthony (* 03. Januar 1942 in Vereinigtes Königreich; Koreanischer Name: An, Sonjae)
Back to Heaven (1970)
By Cheon, Sang-Byeong
I’ll go back to heaven again.
Hand in hand with the dew
that melts at a touch of the dawning day.
I’ll go back to heaven again.
With the dusk, together, just we two,
at a sign from a cloud after playing on the slopes.
I’ll go back to heaven again.
At the end of my outing to this beautiful world.I’ll go back and say: It was beautiful
[1] Die nach Westdeutschland entsandte Krankenschwester,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928.
[2] Jeon-mae-cheong,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392.
[3] Trostfrauen, https://de.wikipedia.org/wiki/Trostfrauen.
[4] siehe East Berlin Affair, https://en.wikipedia.org/wiki/East_Berlin_Affair.